계산리 오층석탑(桂山里 五層石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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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재지 : 청원군 가덕면 계산리 48번지
- 종류 : 보물 제511호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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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피반령 북쪽 기슭의 계산리 장터마을에 있는 이 석탑은 계산리사지(桂山里寺址)에 남아 있는 유일한 석조물(石造物)이다. 절터는 모두 폐허가 되어 논 밭으로 변하고 5층석탑만이 중심부에서 옛자리를 지키고 있다. 단층기단(單層基壇)과 5층의 탑신부(塔身部)는 원형대로 있으나 상륜부(上輪部)는 모두 없어졌는데 전체적으로 보존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각층의 탑신은 우주(隅柱)나 탱주(撑柱)가 표현되지 않았고 1층은 4매의 면석(面石)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2층 이상은 1매의 탑신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옥개석(屋蓋石)은 1·2층만이 2석(石)이고 그 이상은 1석이며, 옥개석의 층급받침은 1·2층이 5단, 3·4층이 4단, 5층이 3단으로 위로 갈수록 체감되어 있어 안정감을 주고 있는데 전각(轉角)이 곡선으로 처리되지 않고 낙수면(落水面)이 짧은 것은 전탑양식(塼塔樣式)에서 보이는 특이한 모습으로 둔중한 인상을 준다.
그리고 각층의 옥개석 상단에는 위층의 탑신석을 받기 위한 1단의 고임대가 마련되어 있어 결구상의 특색을 나타내고 있다. 이 탑에서 주목되는 것은 기단이나 탑신에 우주나 탱주가 생략되고 옥개석의 반전이 없이 낙수면이 짧은 양식 등인데 이러한 조탑수법은 이곳의 지방적 특색으로 보인다. 조성시기는 고려초기로 추정되고 있으며, 탑의 규모는 전체 높이 약 7m로 각부는 기단하대석폭 212cm, 기단 중대 석폭 175cm, 기단 갑석 높이 23cm , 부연 높이 8cm, 폭 195cm, 초층 옥신석 높이 30cm, 폭 130cm, 초층 옥개석 높이 95cm, 폭 195cm, 2층 옥신석 높이 30cm, 폭 110cm, 2층 옥개석 높이 70cm, 폭 160cm이다.
보한재 영정(保閑齋 影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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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재지 : 청원군 가덕면 인차리 13
- 종류 : 보물 제613호
- 상세정보
- 이 영정은 조선초기의 학자이며 세조의 등극을 도와 보필한 영의정 신숙주(申叔舟)의 영정이다. 신숙주의 자는 범옹(泛翁), 호는 보한재(保閑齋), 희현당(希賢堂), 본관은 고령(高靈)으로 세종(世宗) 20년(1438)에 진사(進士), 생원(生員)에 들었고 이듬해에 문과에 3등으로 급제하여 여러 요직을 거치면서 세종을 도와 훈민정음을 창제하는데 공이 컸다. 세조가 즉위하자 공신(功臣)이 되어 우의정과 좌의정을 걸쳐 영의정을 지내기도 했으며 경국대전(經國大典)과 세종실록·예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고 동국통감(東國通鑑)·오례의(五禮儀)를 왕명으로 편찬하였다.
영정은 모시 바탕에 그렸는데 공신도상식(功臣圖像式)이며 문관(文官)의 일상복에 모대(帽帶)·발받침을 구비하고 옆으로 약간 틀어 앉아 있는 왼쪽 모습을 그린 의상(椅像)이다. 상은 모시 바탕에 묽은 먹물로 초상(草像)하고 색을 칠한 후 농담(濃淡)이 조화된 묵선(墨線)으로 윤곽을 뚜렷하게 그린 형태로 화폭은 비교적 큰 편이다. 흉배(胸背) 무늬는 관복에 직접 금방 혹은 자수하였는데 후세에 많이 보이는 자수방형흉배(刺繡方形胸背)와는 달리 명(明)나라 양식을 따른 것으로 보이며 구름 아래 목단(牧丹)과 금계(錦鷄)를 안배하였으니 당시의 복제(服制)로 미루어 정2품직(正二品職)을 나타낸 것으로 짐작된다. 영정의 오른쪽 여백에는 신숙주의 사후 75년에 다시 색을 칠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현재의 상태로 보아 그 이후의 보수는 없었던 듯하다.
신형호 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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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재지 : 청원군 가덕면 인차리 147-1번지
- 종류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48호
- 상세정보
- 신형호 고가는 조선 고종 18년 (1881)에 지은 한옥이다. 본래는 안채와 사랑채 곡간채 뜰아래채 마부채 등이 있었으나 한말에 이 집에 살던 신정식(申正植)이 의병에게 숙식을 제공하였다는 이유로 일병(日兵)이 방화하여 현재는 안채만 남아있다. 안채의 구조는 2칸의 대청을 중심으로 왼쪽에 부엌과 퇴가 달린 건너방을, 오른쪽에 부엌과 퇴가 달린 안방과 윗방이 있는 정면 5칸, 측면 4칸의 ㄱ자로 되어 있으며 홑처마 합각지붕의 기와집이다.
독립운동가 신형호의 생가이기도 한 이 고가는 현재 신기호(申紀浩)일가가 살고 있다.
화림사 석조여래좌상(石造如來坐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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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재지 : 청원군 가덕면
- 종류 :비지정 문화재(불교유적)
- 상세정보
- 화림사 대웅전 안에 봉안된 주존블로서 1940년에 인근의 계곡에서 이 석불을 발견하여 화림사를 창건하게 되었다고한다. 화강암으로 조성하였으며 결가부좌(結勳雌述)한 여래상으로 전체에 금분을 칠하여 원형을 잃었다. 나발(螺髮)의 머리 위에는 좁고 큰 육계(肉警)를 마련하였으며 양쪽 귀는길게 늘어져 어깨 가까이 닿았고 얼굴 모습과 목의 삼도(三違)는 금분칠을 하여 식별하기 어렵다.
법의(法衣)는 통견(通肩)이며 수인(手印)은 우수를 내장(內掌)하여 오른쪽 가슴에 대고 좌수는 가습 앞에 상장( 「=掌)하여 보주(麥珠)를받쳐 들고 있다. 전체적인 표현수법으로 보아 고려중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불상의 크기는 전체높이 145cm, 머리높이 5Ocm, 어깨너비 64cm,몸두께 23cm이다. ㅇ
화림사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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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재지 : 청원군 가덕면
- 종류 :비지정 문화재(불교유적)
- 상세정보
- 화림사 대웅전 앞 숲 속의 암반 위에 있는 파괴된 석탑이다. 석탑의 상태로 보아 원래는 3층탑이었을 것으로 보이나 현재는 초층탑신과 1·2층의 옥개석만이 남아있다.
자연암반 위에 규격이 일정치 않은 1매석의 기단이 놓였는데 옥개석 상면에는 1단의 조출(彫出)이 있다. 그 위의 초층옥신석은 밑에 3단의 층급받침이 있고 낙수면에는 약간 반전(反轉)되고 밑에 옥신괴임이 보인다.
2층옥신은 4개의 석재편으로 올려 놓았는데 그 중 일부는 본래 옥신석의 파편으로 추정되며, 2층옥개석은 밑에 3단의 층급받침이 있고 낙수면이 약간 반전되었고 윗면에 1단의 괴임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상륜부는 현재 노반석(露盤石)의 반쪽이 남아 있는데 완전히 관통된 찰주공(擦注孔)이 있다조성연대는 대략 고려시대로 추정된다.
탑의 규모는 현재높이 14m, 지대석 78.3cm x 69cm, 높이 25cm, 초층옥신석폭 48.5cm, 높이 49cm, 우주폭 9cm, 초층옥개석폭 86cm, 높이 29.5cm, 2층옥개석폭 73cm, 높이 21.5cm, 노반높이 14cm, 찰주공지름 8.5cm이다.
백족사 삼층석탑(白足寺 三層石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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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재지 : 청원군 가덕면
- 종류 : 비지정 문화재(불교유적)
- 상세정보
- 백족사 대웅전 앞의 자연암반 위에 세워져 있는 석탑으로 1940년대에 발견하여 이곳에 복원하였다고 전해진다. 자연암반 위의 기단석은 탐신형의 중대석과 갑석으로 이루어졌고, 초층의 탑신부는 결실되어 시벤트로 보강하였으며, 1층옥개석 이상은 잘 남아 있다. 탑신석에는 우주(暇柱)가 모각되어 있고 옥개석에는 4단의 층급받침과 낙수홈이 조각되었으며 , 낙수면은 경사가 완만한 편이다. 상륜부(相輪部)는 모두 결실되어 복원할 때 복발(覆銳)과 수연(水煙)을 모조하여 올려 놓았다. 석탑의 조성시기는 우주의 각출, 전각의 반전, 4단의 층급받침, 낙수흠 등을 보아 고려시대 전기로 추정된다. 석탑의크기는 전체 높이 200cm, 초층옥신높이 31cm, 폭 41.5cm,초층옥개높이 24cm, 폭 83cm, 2층옥신높이 12cm, 폭 30cm,2층옥개높이 13cm, 폭 63cm, 3층옥신높이 10.5cm, 폭 26cm, 3층옥개높이 15cm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