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심사 영산회괘불탱(安心寺 靈山會掛佛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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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재지 : 청원군 남이면 사동리 271번지
    • 종류/규모 : 국보 제297호 / 가로 486.5㎝, 세로 741㎝
    • 지정일 : 1997년 9월 22일
    • 시대 : 조선효종(孝宗) 3년(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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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정보
  • 구룡산(九龍山) 서쪽 기슭 사동리 절골마을에 자리잡은 안심사(安心寺)에 있는 불화(佛畵)로 비로전(毘盧殿)안의 불단 앞에 목제함을 마련하고 그 안에 보관하고 있다.

    이 괘불(掛佛)은 윗부분 일부에 약간의 손상이 있으나 전체적으로 보존상태가 양호하고 색조가 거의 원상을 간직하고 있다.

    불화의 내용은 석가여래불(釋迦如來佛)을 주존(主尊)으로 그 주위에 불(佛)·보살(菩薩)과 제자들인 교화성중(敎化聖衆)과 사천왕(四天王)의 호법신(護法神)들을 좌우대칭으로 배치한 영산회상도(靈山會相圖)로 설법을 듣기 위해 모여든 청문성중(聽聞聖衆)과 지방불(地方佛)이 둘러싸고 있는 구도를 실감나게 나타내었다.

    주존은 나발(螺髮)의 머리에 높고 뾰족한 육계가 있고 중간에 계주가 있으며 눈·코·입과 수염이 장식화되어 조선중기의 불화수법을 보여준다. 불화의 하단에는 "순치 9년 임진 4월일(順治九年 壬辰四月日)"이라는 먹글씨(黑書)가 있어 조선 효종(孝宗) 3년(1652)에 제작되었음을 밝혀주고 있으나 화공의 이름은 기록되지 않았다.

    괘불을 배접한 삼베바탕의 크기는 가로 486.5cm, 세로 741cm이며, 불화의 크기는 가로 462cm, 세로 627cm이며 본존상(本尊像)의 높이는 372cm이다.

    1990년에 국고보조를 받아 화강암으로 조성된 괘불대(掛佛臺)를 대웅전 앞에 설치하여 부처님 오신날 등 중요한 행사때 괘불을 걸어 예배하도록 공개하고 있다.

안심사 비로전(安心寺 毘盧殿)

  • 안심사 비로전 이미지
    • 소재지 : 청원군 남이면 사동리 271번지
    • 종류/규모 :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12호 / 정면 3칸, 측면 2칸
    • 지정일 : 1982년 12월 17일
    • 시대 : 조선 광해군 5년(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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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정보
  • 안심사의 대웅전 앞 왼쪽에 있는 건물로 높은 언덕 위에서 향하여 있다. 이 건물의 창건연대는 비로전 안에 걸렸던 목판의 중수기에 의하여 광해군 5년(1623)에 초창되었다가 그 후 세월이 2백여년 지나면서 지붕과 서까래가 퇴락하고 불상이 비바람을 맞을 지경이 되자 여러 사람이 뜻을 합해 헌종 8년(1842)에 중수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나 이 중수기는 1982년경에 없어져 행방을 알 수 없다.

    자연석으로 쌓은 방형의 석단 위에 역시 자연석의 초석을 놓고 둥근 기둥을 세웠으며, 건물구조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식 맛배집으로 양측면에는 풍벽을 달았고 앞면은 모두 정자 살문을 달았다. 그리고 전면의 네 기둥에는 해서체로 쓴 주련이 달려 있다.

    본래 이 건물은 비로사나불을 주존으로 모신 비로전이었으나 영상전 혹은 나한전으로도 불리워졌으며 현재는 <영산전>이라는 편액을 걸었다. 현재 이 건물 안에는 석가세존의 16대 제자상인 목조의 십육나한상이 봉안되어있다.

    이 건물의 특징은 맞배식 건물인데도 좌우측면에 공포를 설치한 점인데 이것은 팔작지붕 대웅전을 중수할 때 맞배지붕으로 변형되면서 공포가 그대로 남아 있는 구조가 된 것을 비로전 건축시에 모방한 것으로 보인다.

    1989년에 기와를 다시 올리고 단청을 새롭게 하였으며 기단 축대도 다시 쌓아 단장하였다.

안심사 대웅전(安心寺 大雄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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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재지 : 청원군 남이면 사동리 271번지
    • 종류/규모 : 보물 제664호 / 정면 3칸, 측면 2칸
    • 지정일 : 1980년 6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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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정보
  • 안심사의 주존(主尊)을 모신 법당으로 조선중기의 일반형 목조와가(木造瓦家)이다. 신라 혜공왕(惠恭王) 11년(775)에 진표율사(眞表律師)가 중건하고, 그 후 조선 인조(仁祖)4년(1626)에 송암대사(松庵大師)가 중건하였다고 전해진다.

    현존 건물은 1626년에 중건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처마 끝에 장식된 암막새 기와에 "강희십일년임자(康熙十日年壬子)" 명문(銘文)이 있어서 현종(顯宗) 13년(1672)에 번와한 사실을 알 수 있고 그 후에도 수차 중수를 거듭하여 오늘에 이른 것으로 추정된다.

    3단의 자연석으로 된 기단 위에 다듬지 않은 자연석을 주석으로 삼았으며 건물구조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식(多包式) 맞배건물로 측면에도 공포가 있어서 매우 이례적이다. 건물내부의 천정에는 대웅전을 장엄하게 보이기 위해 만든 화려한 닷집을 갖추었다.

    1976년 12월 23일에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6호로 지정되었다가 1980년에 보물로 승격되었다.

안심사 세존사리탑(安心寺 世尊舍利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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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재지 : 청원군 남이면 사동리 271번지
    • 종류/규모 :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7호 / 높이 200㎝
    • 지정일 : 1976년 12월 20일
    • 시대 : 조선 말기(19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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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정보
  • 안심사 대웅전의 서편에 놓인 석종형 부도(石鐘形 浮屠)로서 탑비(塔碑)와 함께 잘 보존되어 있다. 이 부도는 신라 혜공왕(惠恭王) 11년(775)에 진표율사(眞俵律師)가 안심사를 창건할 때 석가세존의 사리를 봉안하였다고 전해지는데 세존사리비에 보면 탑의 행방을 모른 채 오랜 세월을 내려오던 중 이곳 구룡산에서 발견하여 조선 고종 18년(1881)에 구천동(九天洞)에 옮겼던 것을 다시 광무(光武) 4년(1900)에 광우(廣祐)와 등원(登院)등 두 스님이 안심사로 옮겨 세웠다고 하는데 이 부도탑은 조성양식으로 보아 조선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방형 1층의 지대석 위에 8각형의 하대석을 놓아 만든 전형적인 석종형 부도로 8각의 하대석 각면에는 아무런 문양이 새겨지지 않았고 탑신을 받치는 괴임대도 마련되지 않았는데 하대석 윗면에는 십자형(十字形)으로 홈이 파여져 있다. 탑신에도 아무런 문양조식과 명문이 새겨지지 않았고 상륜부는 28과(果)의 연주문(連珠紋)을 돌려 구획하였다. 상륜은 보주형이며 상단을 뾰족하게 표현하였다.

동화사 석조비로사나불좌상(東華寺 石造毘盧舍那佛坐像)

  • 동화사 석조비로사나불좌상 이미지
    • 소재지 : 청원군 남이면 문동리 150번지
    • 종류/규모 :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68호 / 불상높이 148㎝
    • 지정일 : 1990년 12월 14일
    • 시대 : 신라말~고려초(10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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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정보
  • 속칭 "남수원절" 이라 불리는 동화사(東華寺)의 대웅전 안에 주존으로 모셔져 있는 불상으로 광배(光背)를 잃고 있을 뿐 거의 완형에 가깝다. 높은 대좌(臺座)위에 결가부좌한 좌상으로 목이 부러져 있던 것을 복원하여 놓았는데 잘못 복원하여 불두(佛頭)가 오른쪽으로 약간 돌려져 있다. 나발(螺髮)의 머리에는 낮은 육계가 있으나 뚜렷하지 않으며, 얼굴 모습은 마멸된데다가 전신에 金粉을 칠하여 원형을 확인하기 어렵다.

    수인(手印)은 마멸로 뚜렷하지 않으나 오른손을 아래로 하고 왼손을 위로 하여 가지런히 모은 점으로 미루어 지권인(智拳印)을 결한 것을 알 수 있으며, 이로써 이 불상은 비로사나불(毘盧舍那佛)로 확인되고 있다. 통견(通肩)의 법의(法衣)는 양어깨로부터 흘러 가슴앞에서 U자형을 이루면서 좌우 대칭으로 처리되어 무릎을 감싸고 있는데 의문(衣紋)은 도식화되었다.

    불상의 대좌는 상대석(上臺石)의 일부가 깨지기는 하였으나 완전한 형태를 간직하고 있었다. 하대석 이하는 마룻장 밑으로 들어가 있으나 마루 일부를 뜯고 보면 방형의 지대석(地臺石)과 8각형의 기대석(基臺石)이 놓여 있다. 기대석의 8면에는 안상(眼象)을 마련하고 그 안에 사자상(獅子像)을 높게 부조하였다.

    중대석은 8각으로 정면에 향로를 조각하고 나머지 7면에는 합장상(合掌像), 또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 지권인(智拳印)을 결한 여래상(如來像)등 각기 다른 모습의 불보살상(佛菩薩像)을 배치하였으나 현재 중대석은 전후면이 뒤바뀌게 놓여져 있다.

    상대석은 원형(圓形)으로 아래 면에 각형부연(角形副椽)이 마련되었고, 측면에 앙련화문(仰蓮花紋)이 조각되어 있다. 이 불상의 조성시기는 전체적인 조각수법으로 보아 나말려초(羅末麗初)로 추정되며, 실측치는 불상 높이 148cm, 머리 높이 51cm, 어깨높이 91cm, 어깨폭 70cm, 가슴 폭 45cm, 무릎 높이 28cm, 무릎 폭 109cm이며, 대좌는 중대석 높이 31.5cm, 상대석 높이 19cm, 상대석 지름 117cm이다.

박광우 묘소 출토 유물(朴光佑 墓所 出土遺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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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재지 : 청원군 남이면 수대리 산 73-1번지
    • 종류/규모 : 충청북도 민속자료 제6호 / 3점(관,청동방울 5개, 백자소호)
    • 지정일 : 1982년 12월 17일
    • 시대 : 조선인종 1년(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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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정보
  • 조선 중종(中宗)때의 문신인 필재 박광우(필재 朴光佑, 1495∼1545)의 묘소를 경기도 파주군 조리면 오산리에서 청원군 남이면 수대리로 이장할 때 나온 일괄유물(一括遺物)이다.

    관곽(棺槨)의 재료는 향(香)나무로 내외 이중관(內外 二重棺)인데 위가 넓고 아래가 좋은 상광하협(上廣下俠)의 전형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거의 썩지 않은 완형이다. 내관(內棺)에는 바닥에 크기가 알맞은 판자(板子)를 깔았는데 구멍 7개를 불로 뚫은 칠성판(七星板)이 있어서 주목된다.

    내관의 길이 250.5cm, 폭 69.6cm, 외곽(外槨)의 길이 280cm, 폭 95cm이다. 시신의 발밑에서 청동방울 5개가 나왔는데 표면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다. 크기는 높이 2.3cm, 지금 2.6cm이다.

    백자소호(白磁小壺)는 조선시대에 유행하던 부장명기(副葬明器)로 보이는데 목이 짧은 구연부(口緣部)가 특색이며 연꽃 봉우리 모양의 꼭지가 달린 뚜껑이있다.

박광우 묘소(朴光佑 墓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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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재지 : 청원군 남이면 수대리 산 73-1번지
    • 종류/규모 : 충청북도 기념물 제71호 / 1곽 30평
    • 지정일 : 1987년 3월 31일
    • 시대 : 조선 인종 1년(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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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정보
  • 박광우(朴光佑, 1495~1545)는 조선 중종(中宗)때의 문신으로 자는 국이(國耳), 호는 필재(畢齋), 본관은 상주(尙州)이다. 중종 20년(1525)에 식년문과시(式年文科試)에 장원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두루 거치면서 우리나라 역대의 최대 지리서(地理書)인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을 편찬하였고, 인종(仁宗) 1년(1545)에 사간지제교(司諫知製敎)를 역임하다가 을사사화(乙巳士禍)로 논쟁하다가 체포되어 죽음을 당하였다.

    후에 율곡(栗谷)의 상서(上書)로 관직이 회복되고 송천서원(松泉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묘소 중앙의 봉분을 중심으로 봉분 바로 앞에 위패비(位牌碑)와 상석(床石)이 있고, 왼쪽에는 숙종(肅宗) 13년(1687) 송시열(宋時烈)이 찬(撰)한 묘표(墓表)가 있다.

    이외에도 근래에 조성한 사적비(事蹟碑), 장명등(長明燈)과 본래의 것인 문관석(文官石), 동자석(童子石), 망주석(望柱石) 등이 있다. 이 묘는 1977년에 경기도 파주에서 이장한 것으로 조선시대의 일반적인 묘제(墓制)를 따르고 있다.

* 출처 : http://www.culture.puru.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