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대왕 태실유적(英祖大王 胎室遺蹟)
- 조선 영조(英祖)의 태실(胎室)로서 [충청도읍지(忠淸道邑誌)]에 청주 동쪽 20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당시에 태실이 있던 청주목 산내일동면 무쌍리(淸州牧 山內一東面 無雙里)는 곳 오늘의 무성리이다. 이 태실은 조선 숙종(肅宗)21년(1695)에 장태(裝胎)한 영조(英祖, 1694~1776)의 태(胎)를 영조 5년(1729)에 왕의 태실 규모와 구조에 맞도록 다시 봉축(封築)한 것이다.
태실의 형태는 공주에 있는 숙종의 태실을 모방하여 조성한 것으로 중앙에 2단으로 된 정방형의 대석 위에 계란 모양의 태실석(胎室石)과 팔각의 갓처마돌을 놓고 주위에 8개의 장대석을 팔각으로 놓고 팔각의 모서리에는 우주석(隅珠石)을 세웠다. 8면의 중앙에는 사각의 동자석을 세운 뒤 육각의 장대석을 가로 얹은 석난간을 둘렀다.
태실 앞에는 귀부(龜趺) 위에 비신(碑身)을 세우고 이 를 상단에 조각한 태실비(胎室碑)를 세웠는데 비신의 앞면에는 "주상전하태실(主上殿下胎室)"이라 쓰여있고 뒷면에는 "옹정7년10월14일건(雍正七年十月十四日建)"이라 쓰여 있다.
이 영조태실은 조선조 말기까지 나라에서 8명의 수호군을 두어 관리하였으나 1928년에 일제의 조선총독부가 전국에 있는 태실을 관리하기가 어렵다는 구실로 태항아리만 꺼내어 서울 창경원(昌慶苑)으로 옮기면서 크게 파손되자 뒷날 태실 자리에 민묘가 들어섰고 태실비는 동민들이 마을로 옮겨 세웠는데, 1982년에 청원군에서 갓처마돌이 없는 상태로 태실을 복원하였으며 청원군에서 소장하고 있는 [태실가봉의궤(胎室加封儀軌)](필사본)는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 170호로 별도 지정되어 보호를 받고 있다.
과필헌 고가(果必軒 古家)
- 과필헌(果必軒) 고가(古家)는 과필헌 신후(申逅, 1708∼1779)가 지은 전통한옥이다.
조는 2칸의 대청을 중심으로 왼쪽에 1칸의 건너방을 오른쪽에 앞마루를 둔 2칸의 안방과 부엌이 있는 정면 6칸, 측면 2칸의 일 자(一字)로 된 안채와 그 앞에 중문이 있는 곡간채를 두고, 2칸의 안방과 부엌이 있는 정면 6칸, 측면 2칸으로 된 사랑채로 되 어 있다. 안채와 사랑채는 모두가 홑처마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현재 신오식(申五植)씨 일가가 살고 있다.
묵정영당(墨井影堂)
- 묵정영당은 조선 순조(純祖) 30년(1830)에 세조(世祖)의 즉위에 공을 세워 좌익공신(左翼功臣) 1등으로 책록되고 고령부원군(高 靈府院君)에 봉해진 영의정 문충공(文忠公) 보한재(保閑齋) 신숙주(申叔舟 , 1417∼1474)의 영정을 봉안한 영당으로 매년 음력 3월 15일과 9월 15일에 향사하고 있다.
영정은 영조(英祖) 25년(1749)에 가덕면 인차리의 구봉영당(九峰影堂)에 있는 원본(보물 제613호)을 모사(模寫)한 관복(官服) 의 전신교의좌상(全身交椅坐像)으로 가로 113cm, 세로 225cm의 설채견본(設彩絹本)인데 해좌(海左) 정범조(丁範祖)가 쓴 화상 찬(畵像讚)이 있다.
지금의 영당은 1984년에 중건하고 1989년에 보수한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2칸 겹처마 맞배지붕의 목조기와집인데 내부는 통칸 마루방에 쌍문을 달고 좌우에 퇴간을 두고 앞마루를 놓았으며 "묵정영당(墨井影堂)" 이란 편액을 걸었고 마당 앞에 삼문을 세 우고 담장을 쌓았다.
신중엄 신도비(申仲淹 神道碑)
- 이 비는 조선 선조(宣祖)때의 문신었던 신중엄(申仲淹 , 1522∼1604)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신중엄은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계모와 동생을 성(誠)과 효(孝)로써 극진히 받들어 그 효행이 널리 알려졌다.
벼슬길에 올라 주부(主簿), 감찰직(監察職)에 있을 때는 군민(郡民)을 교화로 인도하였고, 임진왜란(壬辰倭亂)때는 군량미 부족으로 어려움이 많은 것을 알고 자신의 재산으로 군량미를 조달하는 등 국난대처에 노력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제수하였다. 그가 80세가 되니 조정에서는 다시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 同知中樞府事)의 벼슬을 내리고 뒤에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다. 신도비는 광해군 1년 (1609)에 심희수(沈喜壽)가 짓고 이산뢰(李山賚)가 글씨를 써서 광해군 11년(1619)에 세웠다.
단재영당(丹齋影堂) 및 묘소(墓所)
- 단재영당(丹齋影堂)은 일제 때의 독립지사이며 사학자이며 언론인이었던 단재 신채호(申采浩, 1880∼1936) 선생을 기리기 위하여 1978년에 그의 영정을 봉안하고 세운 영당으로 그리 묘소 바로 앞에 있다.
영정은 1981년에 한광일(韓光一)이 그린 전신교의좌상(全身交椅坐像)으로 가로 70cm, 세로 110cm의 설채견본(設彩絹本)이다.
영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 겹처마 맞배지붕의 목조기와집인데 내부는 통칸 마루방에 분합문을 달고 앞마루를 놓았으며 [단재영각(丹齋影閣)]이라는 편액을 걸었고 사당 앞에는 [정기문(正氣門)]이라 이름붙인 삼문을 세우고 둘레에는 담장을 둘렀다.
묘소는 선생이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東方無政府主義者聯盟)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복역하던중 1936년 2월 21일에 여순(旅順) 감옥에서 순절함에 따라 선생이 어린시절에 살던 옛 집터에 안장한 것으로 묘정에는 한용운(韓龍雲) 오세창(吳世昌) 신백우(申伯雨) 등이 세운 묘표(墓表)와 1972년에 세운 사적비가 있다.
쌍천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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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재지 :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 305번지
- 종류 : 비지정 문화재(유교유적)
- 쌍천서원은 조선 숙종 21년(1695)에 대사헌(大司憲) 졸재(拙齋) 신식(申湜, 1551∼1623)을 배향하고 세운 서원으로 원생은 15인을 두었다. 그러나 고종 8년(1871)에 사원훼철령으로 철폐되었는데 1915년 유림에서 복설하였고, 1989년에 고령신씨(高靈申氏) 문중에서 다시 세운 뒤 영정을 모시고 매년 음력 3월 중정일과 9월 중정일(重丁日)에 향사하고 있다. 이 서원에 봉안된 신식의 영정은 관복의 전신교의좌상(全身交倚坐像)으로 가로 110cm, 세로 171cm의 설채견본(設彩絹本)인데 제작연대와 화가는 미상이다. 지금의 서원은 1989년에 중건한 건물로 정면 3간, 측면 2간 맞배지붕 겹처마 목조기와집인데 내부는 통간 양회방에 쌍문을 달고 "쌍천서원(雙泉書院)"이라는 현판을 달았고 마당 앞에 솟을대문을 세우고 담장을 둘렀다.
기암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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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재지 : 청원군 낭성면 갈산리
- 종류 : 비지정 문화재(유교유적)
- 기암서원은 조선 숙종 25년(1699)에 문정공(文貞公)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설봉(雪峰) 강백년(姜栢年, 1603∼1681)의 위폐를 봉안하고 세운 서원으로 순조 26년(1826)에 승지(承旨) 금암(琴巖) 오숙(吳熽, 1602∼1675)을 추향하였다. 그러나 고종 8년(1871)에 사원훼철령으로 철폐되었는데, 1984년에 보성오씨(寶城吳氏) 문중에서 낭성면 갈산리 호평마을에 다시 세우고 매년 음력 3월1일에 향사하고 있다. 지금의 서원은 1984년 중건한 건물로 정면 3간, 측면 1간 팔작지붕 겹처마의 목조기와집으로 내부는 통칸 마루방에 중앙에 쌍문과 좌우에 쪽문을 달고 앞마루를 놓았으며 앞처마에는 "기암서원(機巖書院)"이라는 현판을 걸었고, 마당 앞에는 솟을대문을 세우고 담장을 돌렸으며, 1987년에 강당을 새로 지었다. 그리고 바깥마당에 노장우(盧章愚)가 짓고 조수형(趙壽衡)이 쓰고 1984년에 세운 "기암서원중건사적비(機巖書院重建事蹟碑)"가 있다.
묵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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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재지 : 청원군 낭성면 관정리
- 종류 : 비지정 문화재(유교유적)
- 묵정사는 1942년 고령신씨(高靈申氏) 문중에서 그들의 선조인 예조판서(禮조判書) 순은(醇隱) 신덕린(申德隣. 1330∼1402), 공조참의(工曹參議) 호촌( 村) 신포시(申包翅, 1361∼1432), 공조참판(工曹參判) 엄헌(嚴軒) 신장(申檣, 1382∼1433), 대사헌(大司憲) 졸재(拙齋) 신식(申湜, 1551∼1623), 황해감사(黃海監司) 하은(霞隱) 신통(申通, 1560∼1631), 종산(鍾山) 신집(申潗, 1623∼1688) 등의 단을 만들고, 매년 음력 3월 16일에 향사하다가, 1971년에 위패를 봉안하고 세운 사당이다. 지금의 사당은 1971년에 세운 건물로 3간, 측면 1간반 겹처마 맞배지붕의 목조기와집인데 내부는 통칸 마루방에 3개의 쌍문을 달고 앞마루를 놓았으며 "육현사(六賢祠)"라는 편액을 걸었고, 마당 앞에 "사제문(思齊門)"이라는 현판을 내걸은 솟을대문을 세우고 담장을 둘렀다. 이맛돌에는 "묵정사원(墨井祠院)"이라 각자되어 있다. 1986년에 사당 밑에 강당과 고직사를 짓고 "묵정서원(墨井書院)"으로 이름을 고쳐 부르고 있다.
이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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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재지 : 청원군 낭성면 이목리
- 종류 : 비지정 문화재(유교유적)
- 이정사는 1954년에 항일투쟁을 하다가 순절한 소당(素堂) 김제환(金濟煥)의 제자들이 문순공(文純公) 남당(南塘) 한원진(韓元震, 1682∼1751), 소당(素堂) 김제환(金濟煥, 1876∼1916), 성암(醒巖) 박유형(朴 馨, 1858∼1929)의 위폐를 봉안한 사당으로 일명 "낭성사(浪城祠)"라고 하였다. 그후 1969년에 정당(正堂) 김성환(金成煥, 1875∼1958)과 각재(覺齋) 신태구(申泰求, 1886∼1929)를 추향하고 매년 3월 8일에 향사하고 있다. 지금의 사당은 1969년에 중건하고 1979년에 해체복원한 건물로 정면 3간, 측면 2간 겹처마 맞배지붕의 목조기와집이다. 내부는 통칸 마루방에 분합문을 달고 앞퇴를 두었으며 "이정사(梨亭祠)"라는 편액을 걸었고, 마당앞에 솟을대문을 세우고 담장을 둘렀다.
추봉영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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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재지 : 청원군 낭성면 갈산리
- 종류 : 비지정 문화재(유교유적)
- 추봉영당은 조선 고종 9년(1872)에 추봉(楸峰) 오저(吳著, 1713∼1794)의 영정을 봉안한 보성 오씨(寶城吳氏)의 사당이다. 1985년에 갈산리 소암마을에서 갈산리 백호마을로 이전 복원하고 매년 음력 9월 9일에 향사한다. 이곳에 봉안된 영정은 관목을 전신교의좌상(全身交椅坐像)으로 가로 45cm, 세로 68cm의 설채견본(設彩絹本)인데 화가와 제작년대는 미상이다. 현재의 영당은 1985년에 중건한 건물로 정면 1간, 측면 1간 겹처마 맞배지붕의 목조기와집으로 내면은 통칸 양회방에 쌍문을 달았으며 "추봉영당(楸峰影堂)"이라는 편액을 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