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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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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구 충절지사

신석구 충절지사

신석구(1875~1950)는 호가 은재로 청원군 미원면 금관리에서 신재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 한학을 공부하다가 33세 때 개성 남부감리교회에서 미국인 선교사 왕영덕에게 세례를 받고 기독교에 입교한 후 서울의 협성신학교를 졸업하고 감리교 목사가 되어 서울·개성·춘천·원산·남포 등에서 종교운동 및 민족사상과 독립사상 고취에 노력하였다.

감리교 계통에 속한 그는 정동교회 이필주의 집에서 민족대표로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중앙기독교청년회 간사인 박희도 등과 같이 천도교·불교·학생 등의 조직과 독립운동의 연합전선을 구축하여 거족적인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때 체포되어 경무총감부에 구금되었다가 1920년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2년형을 선고 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었다. 공판 과정에서도 「나는 한일병합에도 반대하였으나 독립이 될 때까지 할 생각이다」라고 하여 그의 독립에 대한 굳은 의지를 보여 주었다.

그는 출옥 후에도 천안에서 신사참배를 거부하였으며 평안도 용강군 신유리 교회에서는 1954년 2월에 일제가 강요한 「전승기원예배」를 거부하여 용강경찰서에 3개월간 구금되는 등 여러 번 투옥되었다. 해방 후에는 북한에서 반공운동을 전개하였는데 「3·1절 기념방송사건」과 「기독교민주당비밀결사사건」으로 투옥되었으며 1949년 4월 남포에서 「반동비밀경사」의 고문으로 추대되었다는 협의로 10년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향년 76세로 1950년 11월 평양교외에서 총살 당하였다. 정부에서는 1963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으며 1980년에는 청주시 우암산에 삼일공원을 조성하고 그의 동상을 건립하여 공적을 기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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